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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논어를 통해 본 인간과 사회의 고찰 ⑤


[이남곡 | 연찬문화연구소 이사장]
(5) 인(仁)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고금합작(古今合作)의 길

긴 꼬리를 지닌 혜성이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듯, 인류라고 하는 동선(動線)이 긴 생명체가 대우주의 무대에서 모든 신(神)들의 주목을 받으며 진화의 장정(長征)을 연출하고 있다. 동선이 길다고 하는 것은 원시에서 현대의 이르는 모든 문명의 단계들이 부침(浮沈)과 생장소멸을 거듭하면서도 같은 시대 안에 아직도 공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학기술의 엄청난 발전이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인류의 미래에 획기적 전망을 갖게 하는 반면, 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전쟁과 테러에 의한 살륙(殺戮), 폭정, 기아, 억압, 수탈이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계속되고 있고, 요즘 들어 더욱 심각해진 핵전쟁의 위협과 지구환경의 악화는 인류 존속 자체의 위기로 되고 있는 등 이 모든 것들이 동시대에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혹자는 말세나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혹자는 이 혼란과 격변의 시기를 인류가 질적 도약을 위해 나아가는 거대한 변혁의 장(場), 거대한 과도기로 보기도 한다. 나는 후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

독일 철학자 야스페르스(Karl Jarspers)는 2,500여 년 전 현자들이 동서양의 여기저기서 나타난 놀라운 시대를 이른바 ‘축(軸)의 시대(Axial age)’라고 불렀다. 이 시기를 동물계로부터 비약(飛躍)한‘인간’, 즉 ‘정신’이 출현한 시기로 보는 것이다. 비로소 우주자연의 리(理)에 부합한 인간의 관념 즉 이념(理念)이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소수의 선각자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것이 보편화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2,500여 년이 지난 지금 마침내 인류는 인공지능을 비롯한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놀라운 시대 앞에 서 있다. 이제 보편적 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인간의 행위능력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선각자의 정신이 인류의 보편적 현실과 만나는 시대가 바로 21세기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고금합작(古今合作)의 시대다. 그 선각자의 한 사람이 공자(孔子)이고, 그의 사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책이 논어(論語)다. 공자 사상의 핵심으로 알려진 인(仁)을중심으로 고금합작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갈 새로운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5회에 걸친 연재를 마치려고 한다.

우주 자연계에 가장 신비로운 것은 생명이다. 그중에서도 ‘인간’이다. 공자의 인(仁)은 바로 이 인간의 생명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관념의 정상화>와 <구체적 실천>을 말한다. 그동안 가장 오해된 부분이 바로 이 분야 같다. 규범이나 예의범절 제도 등은 이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공자의 시대와 사회에서 제시한 규범, 예절, 윤리 질서 등이 굳어져서 그것이 공자 사상의 핵심처럼 인식된 것이다. 공자 사상의 알맹이를 싸고 있던 외피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을 알맹이로 잘못 인식되어 온 것이다. 공자의 반대자들은 물론이지만,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수 없이 왜곡되어 왔고, 특히 권력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면서 심각한 폐해를 나타내기도 했다. 비록 부족하고 나 스스로 공자를 왜곡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무릅쓰고, 현대 인류의 지성의 빛에 비추어서 살펴보려고 한다.

1. 인(仁)은 극기복례(克己復禮)다

「안연이 인에 대하여 묻자 공자 말하기를, “극기복례(克己復禮)가 곧 인이니, 하루 극기복례하면 온 천하가 다 인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인을 이룸이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니, 어찌 남에게 연유하는 것이겠는가.”
안연이 그 구체적 조목을 청하자 공자 말하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안연 말하기를, “제가 비록 불민하나 그 말씀대로 실천하겠습니다.”
顔淵 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 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 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공자의 대표적 사상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아마 초등학생도 인(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인(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공자 스스로도 인(仁)을 정의하듯이 이야기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의 문답을 통해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제자 안회와의 문답이 논어 12편에 나오는데 가장 대표적인 설명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 공자는 ‘극기복례가 곧 인(克己復禮爲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은 많이 귀에 익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 참뜻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극기훈련’을 많이들 한다고 하는데, 잘 참지 못하는 요즘 세대에게는 ‘참는 훈련’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절대빈곤이나 독재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싫어도 참아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가 진척되다 보니 높아진 자유도(自由度)에 반비례해서 참아내는 힘이 너무 없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자식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참아내라’는 충고를 많이 하시는데 젊은이들의 참는 힘이 적은 것도 있지만 그 분들의 관념 속에는 ‘참는다’는 것이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싫다고 생각하는 것도 ‘참고 이겨내는 것’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극기(克己)를 그저 ‘참고 이겨내는 것’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공자가 말하는 진정한 극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극기는 절사(絶四)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의 네 가지 끊음을 통해 극기란 결국 ‘무아집’으로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참아야만 하는’ 부자유의 세계가 아니라 ‘참을 것이 없는’ 자유의 세계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극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복례(復禮)도 극기와 따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복례를 ‘사람 사이에 지켜야할 바람직한 행위규범에 따라야 한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하고 싶지 않아도 참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행동거지를 사회규범(禮)에 맞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부자유가 있을 수 있다. 즐겁지 않은 것이다.

공자가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예를 즐긴다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가 즐거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딱딱한 규범의 세계가 아니라 ‘아집’을 넘어설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사이좋음’인 것이다. 즉, 극기복례는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지향하는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아집을 넘어선다는 것은 사람이나 일에 대해서 참는 것(忍)으로부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恕)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분노와 증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높아진 자유도에 비추어 볼 때 공자의 ‘극기복례’는 현대에 와서 더욱 인간의 목표로 삼을만한 것이다.

일일극기복례(一日克己復禮) 천하귀인언(天下歸仁焉)이라는 말은 깊은 감동을 준다. 분노와 미움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克己)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의를 바로잡아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復禮). 하루라도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증오와 분노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세상이 진보하는 길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선구자인 것이다. 극기(克己), 즉 아집을 넘어서는 인격의 성숙과 복례(復禮), 즉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 하나인 것이다. 인(仁)은 자기로부터 말미암은 것(爲仁由己)이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인을 원하기만 하면 그 인이 이르러 온다(我欲仁 斯仁至矣)’라는 말과 통하는 것이다. 가장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이다. 실제로 해보면 바로 증명되는 삶이다. 좌측 깜박이를 넣고 있는 차를 위해 잠시 차를 세우는 것만으로도 그 근방에 인(仁)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양보하는 따뜻한 말이나 행위 하나가 사회적 공기를 바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말도 잘못 읽으면 비례(非禮)에 대해서 오불관하는 식의 소극적 은둔적 사고방식이나 금기(禁忌)나 계율(戒律)로 읽기 쉽지만, 그런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기로부터 비례(非禮)를 범하지 않는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과제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사회의 부조리나 부정을 시정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금기(禁忌)나 계율(戒律)처럼 받아들이기 쉽다. 논어 전체를 관통하는 공자의 태도를 볼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공자의 진의(眞意)를 왜곡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우선 예(禮)는 밖으로 나타난 질서나 규범이지만, 공자에게는 항상 내면의 마음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으로 흔히 말하는 허례(虛禮)를 가장 경계하고 있다.

이런 구절은 논어의 도처에서 나온다. ‘하지말라(勿)’라고 말한 것은 그 근기(根機)에 부합하는 수행 방식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생각된다. 처음부터 네 가지를 끊은 무아집의 사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인간의 질서(禮)에 반(反)하는 것에 끌리는 마음을 차단하는 연습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이런 연습은 우리 교육에서 깊이 생각할 부분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질을 떨어뜨리는’ 너무 많은 환경을 청소년기부터 만나고 있다. 게임 광고를 보면 거의 ‘전쟁 놀음’이고, 가장 접하기 쉬운 것이 ‘야동’이며, 피 흘리는 격투기가 권투 시합보다 훨씬 인기가 있는 프로그램이고, 미움과 분노와 편가름의 막말들이 횡행하고,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를 어려서부터 만나고 있다. 우선 이런 것으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참으로 어려운 테마이긴 하다. 자본주의의 상업성이 인간의 낮은 욕망과 결합하기 때문에 이런 환경은 계속 만연한다. 마치 금연(禁煙) 캠페인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담배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과 흡사하다. 이런 질 낮은 사회에 원인을 돌리고 그것을 개혁하지 않는 한 참된 교육은 불가능하다고 본다면, 그것은 인간사회의 진보나 진화의 과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일면적인 것이다. 사회를 정상화하기 위한 노력과 비정상적인 환경 속에서도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을 양성하는 노력은 어차피 병행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교육의 능동적 역할이다. 아마도 공자는 그 당시에도 이런 고민을 했을 것이다. 공자 당시보다 비교할 수 없이 나아진 물적·제도적 환경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진정한 교육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선순환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다. 교육은 먼저 자기로부터 ‘인’을 실현하여 천하의 ‘인’을 실현해가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과정이다.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에 비해 자신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많이 뒤떨어지는 것이 가장 큰 테마로 되고 있는 지금, 진정으로 세상의 진보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현대적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기복례는 금기나 계율의 세계가 아니라 자율과 자각의 세계다. 다만 그것을 위한 수행과정으로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을 말하고 있다고 나에게는 보인다.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는 비례(非禮)를 안보고 안 들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마음을 미혹시키지 않는 연습을 하라는 것인데, 결국 욕구의 질을 높이는 것이 그 바탕이 될 것이다. 즉 호학(好學), 호례(好禮)하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진정한 생명력의 신장이야말로 인(仁)의 핵심 사상이며, 금기나 계율 같은 규범을 확대하는 사회는 결코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힘든 노동에서 해방될 4차 산업혁명의 사회를 생각할 때, 지금의 인간의 욕망을 생각하면 어떤 세상으로 될 것인가? 공자의 말들이 더 급박한 현실로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2. 서(恕)와 충(忠)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한다

「자공이 묻기를, “한 마디의 말로 평생토록 실행할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 답하기를, “그것은 서(恕)일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면,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 (제 15편 위령공)
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勿施於人」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
증자가 말했다. “예, 그러합니다.”
공자가 나가시자 제자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따름이니라.” (제4편 이인)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평생의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을 말을 청한 제자에게 공자는 서(恕)를 말한다. 용서할 ‘서’라고 읽지만, 보통 말하는 ‘나는 옳고, 상대가 잘못했을 때 하는 용서’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 요즘 말로 하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의 생각에 동의해야 하느냐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이 아니다. 다름을 다름으로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공자처럼 ‘무지(無知)의 자각’을 진리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틀림없다’는 것은 근거 없는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군자의 특징인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바탕이 되고, 오늘 날의 말로 하면, 실사구시(實事求是) 구동존이(求同尊異)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사실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서(恕)는 머리로는 예전보다 훨씬 받아들이기 쉽게 되었지만, 아직은 실제의 삶과는 유리되어 있다. 공자는 그 근기(根機)에 맞게 또 물(勿)자(字)를 사용한다. 그것이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다. 알기 쉽게 말한 것이다. 내가 제일 원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나를 받아주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서(恕)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곡(正鵠)과는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다소 간의 자기중심성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도만 되어도 훌륭하다.

이 서(恕)와 충(忠)이 짝을 이루어 공자가 일이관지(一以貫之)한 것이다. 충(忠)에 대해서도 공자는 정의(定義)한 것이 없다. 우연히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는 15세기 독일 철학자의 ‘거룩함’에 대한 정의를 보고, 아마 이것이 충과 통하는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에크하르트는 거룩함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첫째, 해야 할 일의 다음을 하는 것, 둘째 그 일에 전념하는 것, 셋째 그 일이 기쁠 것” 즉 자발성과 전념과 기쁨이다. 서(恕)가 안 되면 충(忠)이 되기 어렵다. 충(忠)은 자신의 생명력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서(恕)는 다른 사람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것인데, 결국 돌아와 자신의 생명력을 신장시키게 된다.

어떤 협동조합 강좌에서 내가 한 이야기다.

협동조합이 아무리 좋은 취지로 시작하더라도 망해버리면 그만이다. 내부적으로는 경쟁과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동기를 발전시키는 것이 협동조합의 본령이지만, 외부적으로는 시장 안에서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특히 일반적으로 이윤과 경쟁을 동력으로 하는 다른 사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더 큰 비전을 그리며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사실 지금의 높은 생산력과 소비수준의 근저에는 ‘경쟁’이 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누군가와는 같이 해야 한다. 그런데 오랜 세월 늘 부족한 재화를 놓고 다투다보니 이 ‘경쟁’이 지배적인 인간 행위의 바탕처럼 되어버렸다. 이제는 재화가 풍부해졌는데도 이 경쟁의식은 변하지 않고, 더 많은 물질에 대한 욕구와 결합하여 ‘무한경쟁’을 찬미하는 지경에 왔다. 그런데 ‘경쟁’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이것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각하고 있다. 이것을 자각하고 삶 자체를 바꾸는 결단을 내리는 과정으로 협동조합을 선택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사실 나는 이런 동기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중견기업들이 출현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협동하자!’고 해서 경쟁을 넘어서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협동할 수 있는 사람, 즉 협동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로 되는 것이 먼저 되어야 비로소 협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협동이 즐거워야 생산력도 떨어지지 않게 된다.그렇게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다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恕)이 먼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일에 ‘자발적으로 전념’할 수 있게 된다. 공자는 이것을 충(忠)이라 부르고, 15세기의 에크하르트는 이것을 ‘거룩함’이라고 부른다. 무엇이라 부르건 이 두 상태가 만나는 것이 협동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부자유한 협동, 즐겁지 않은 협동은 공허한 것이다. 좋아서 즐거워서 하는 협동이 아니면, 마치 주인 없는 공사처럼 생산력이 떨어지게 된다. 이 마음을 연습하고 그것을 진척시키는 것이 협동조합의 생산력과 직결되는 것이다. ‘자유로운 자기실현의 노동’이 ‘경쟁에 내몰려 쥐여 짜내지는 노동’보다 즐거운 것은 당연하지만 생산력이 나올 수 있을까? 이것은 지난 한 세기가 실험했지만,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지 못한 과제다. 아무리 이상적인 시스템을 만들더라도 생산력이 나오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생산력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최근 경험했거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다.

“요즘 여행도 많이 하고, 남자들끼리만 살다 보니 식당을 많이 가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처음 가보는 식당이라도 잘될지 어떨지가 대강 알 것 같은 느낌이다. 어제 설렁탕집에서도 처음 신경 쓰인 것이 젊은 청년의 태도였다. 아들인 것 같은데,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고, 그 일에 붙고 있는가 였다. 처음에는 좀 걱정스러웠는데, 나중에 마음이 놓였었다. 받아들이는 것이 ‘서(恕)’이고, 붙는 것이 ‘충(忠)’이다. 공자가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나로 꿰뚫음)하였다는 서와 충이 어려운 관념이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그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서’이고, 자기 역할에 즐겁게 전념하는 것이 ‘충’이다. 음식에 정성이 묻어난다. 밑반찬이 좋다. 맛이 있다. 이런 것들은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 식당은 성공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잘하지 못할 때는 일반적인 자본주의 기업에서는 불이익을 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는 비난 받거나 왕따 당하거나 해고된다. 그에게 애정이 있는 사람이나 집단이라면, 그 일이 그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거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서 그가 힘들어하는데 마음이 간다. 어떻게 하면 그가 적성에 맞고 편하게 할 수 있을까, 알맞은 일도 알아보고, 노동조직이나 분업도 바꿔보는 방향으로 마음이 나간다. 이런 마음이 서로 작용하는 곳이라야 자본주의의 결함을 넘어설 수 있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는 책임이 약하고 느슨해서 생산성이 떨어지는 곳이 아니라, 이런 마음이 사회적 공기로 작용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올 세상은 힘든 노동은 인공지능에 의한 기계화·자동화로 이루어질 것이다. 분배 문제만 원활하게 이루어지면(나는 개인적으로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자본주의와 어울리지 않고 무소유 사회 시스템과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마도 이 서와 충이 보편적인 덕성으로 될 것이다. 아마도 소규모의 농업이나 수공예가 가장 인기 있는 일자리 가운데 들어갈 것이다. 자연과 노동의 교감, 아름다움과 노동의 결합, 놀이와 노동의 일치 등 꿈에 그리던 일들이 이루어질 기술적 수준은 머지않아 가능할 것인데, 문제는 사람들의 의식(意識) 지체(遲滯)라고 생각한다. 인문운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종교의 제자리 찾기’이다.

3. 박시제중(博施濟衆)이 최고의 인(仁)

「자공이 여쭈었다. “만일 널리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능히 대중을 고난에서 구제한다면 어떠합니까? 인자(仁者)라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인자에 그치랴. 반드시 성인(聖人)이로다. 요순(堯舜)도 오히려 근심하신 바이니라. 인자란 자신이 서고 싶으면 남을 세우며, 자기가 이루고 싶으면 남을 이루어주느니라. 능히 자신을 미루어 남을 헤아릴 수 있다면, 이것이 곧 인에 이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느니라.”(제6편 옹야)
子貢曰, 如有博施於民 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 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이 구절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이 인(仁)의 최고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주고 받는(give and take) 방식’을 넘어서서 불특정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것에 의해 성립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나는 최고의 이상적인 사회를 ‘줄 수 있는 것이 있고,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 주는 것으로 성립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무소유 사회’다. 줄 수 있는 물질과주고 싶은 마음이 준비되어야 가능한 사회이지만, 나는 자본주의를 평화적으로 넘어서는 사회는 이런 사회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불자(佛者)들에게 매우 익숙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말도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정신적 바탕이며 실천적 과제라고 생각된다. 사실 과거에는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요즘은 지평선 너머로 약간은 보이는 듯하다. ‘기본소득제’ 같은 것이 물질적 준비와 의식의 준비가 된다면, 이런 사회를 향한 보편적인 첫 걸음으로 될 것이다.

4. 연재를 마치며

공자의 논어로 시작했지만, 진정한 고금합작의 길을 우리의 건국이념에서 찾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는 위대한 사상이다. 공자가 최고의 인(仁)으로 말한 박시제중(博施濟衆)은 베푸는 주체와 구제받는 객체가 있지만, 홍익인간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홍익인간을 ‘홍익만유’로 생각하면 생태적 세계관을 그대로 나타낸다. ‘인간(人間)’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존재로 보면 된다. 재세이화(在世理化) 또한 ‘우주자연의 리(理)를 이 땅에서 실현한다’는 뜻으로, 불가(佛家)의 ‘상구보리(上求菩提)하화중생(下化衆生)’을 뛰어 넘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는 현대적인 말이다. 민족(民族)의 능력도 뛰어나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한국인의 평균 IQ가 세계 제일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훌륭한 건국이념과 능력이 빗나가고 있을까?

‘물신에 지배되는 천민(賤民)적이고 이기적인 각자도생’의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세계 7번짼가로 SLBM을 가진 가난하고 시대착오적인 세습왕조. 남북의 현실이다. 이 위대한 정신을 지닌 민족이 곁가지로 빠지지 않고, 그 정도(正道)로, 본류(本流)를 찾아 일변(一變)할 수 있다면, 사상과 문화의 강국으로 되어, 석기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지금 세계의 힘(패권)의 질서를 그 근본에서 바꾸는 진원지가 될 수 없을까? 이런 이상에 좌우와 보혁이 동반자가 되는 것은 헛꿈에 불과한가? 나에게 부여된 기회를 활용하여 이 꿈을 이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의 위대한 집단지성이 깨어나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빈다. 최근 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소개한다.

좌도우기(左道右器)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라’

일체의 고정관념을 경계한 석가의 이야기다. 하물며 강을 건너본 경험도 없고, 오래되어 사용 불능한 뗏목을 짊어지고 다닌다면 어떻겠는가? 무엇을 지킬 것이며,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보수(保守)와 진보(進步)는 시대가 변하면 내용이 바뀔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나는 진보에 가까운 편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진보의 가장 큰 특징을 ‘단정(斷定)하거나 고정(固定)하지 않고, 이 시대의 의(義)를 탐구하여, 실천하는 태도’라고 보고 있다. 증오·편가름·단정·완고·생활과 유리된 관념적 과격성·상대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나타내려는 허위의식 같은 것은 진보와는 인연이 없는 사고방식이나 태도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와 역사의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모순 때문에 갈등(葛藤)과 대립(對立)과 이견(異見)이 없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만한 나라를 만들어 왔다.

이제 나라의 외형적 통계들만 보면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했지만, 내재한 모순들을 풀 힘이 없으면, 다시 나락(奈落)으로 떨어질 위험성이 심각한 수준이다. 경제 침체, 양극화(이중화), 인구절벽, 청년문제, 극심한 국론분열 등에 더하여 첨단핵무기의 실험장으로 만들고 있는 한민족(韓民族)의 어리석음에 심한 절망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좌도우기(左道右器)’라는 말은 경북대 김윤상 교수의 ‘특권 없는 세상’이라는 책을 보다가 발견한 말이다.

그는 좌도우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회가 분열되어, 예를 들면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서로 배척하고 증오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좌파의 입장에서 보는 현실의 우파는 이상사회를 향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속물이며 부당한 기득권을 누리면서 추호도 양보하지 않는 이기집단입니다. 반면 우파의 입장에서 보는 현실의 좌파는, 물정도 모르면서 설치는 하룻강아지이며 ‘사회정의’라는 이상한 깃발을 들고 떼를 쓰는 집단입니다. 이러다 보면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사라지고 혐오만 남습니다. 그러나 저는 합리적인 좌파와 양식 있는 우파라면 공통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해왔습니다. 좌도우기, 즉 좌파가 추구하는 가치를 우파의 방법으로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이 책을 보고 처음 느낀 것은 이런 생각들이 왜 한국사회에서는 ‘비현실적’인 탁상공론으로 들릴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아픈 역사가 낳은 끈질긴 증오와 불신, 그리고 불의한 특권으로 강고해진 기득권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현실 인식 앞에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해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달라지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 동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좌파는 ‘평등’에 방점을 찍고, 우파는 ‘자유’에 방점을 찍는다. 실제 면에서 자유와 평등은 부딪치기 쉽다. 그러나 합리적 이성이 성숙하고 상호간의 신뢰가 이룩되면, 좌파는 불평등의 해결에, 우파는 악평등이 불러오는 부자유의 해소에 역할을 분담할 수 있다. 불평등은 ‘같은 것을 다르게(차별) 대우하는 것’이고, 악평등은 ‘다른 것(차이)을 같게 하려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와 평등은 ‘불평등’과 ‘악평등’의 양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서면 좌와 우는 서로 격렬하게 대립할 필요가 없게 되고, 오히려 서로가 보완 관계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좌도우기’의 이상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총 생산력을 떨어뜨리지 않고, 진정한 평등의 이상에 접근하는 것이다. 수구적인 좌파나 진보적인 우파가 실제로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지만, 아직 적당한 말이 없어 좌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역사의 복잡성 때문에 좌도우기를 실현하려면 고도의 지혜가 필요하다. 새로운 흐름이 정치와 경제의 중심무대로 나올 수 있도록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야한다. 좌파와 우파가 서로를 ‘친일’과 ‘종북’으로 공격하는 이상한 환경에서는, ‘좌도우기’는 한낱 공론에 그칠 수밖에 없다. 나는 진보적 인문운동가로서 북한에 민주적이고 정상적인 정권이 등장하기를 누구보다 원하지만, 그 과정이 민족 전체의 참화로 이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해의 소지가 큼에도 내가 ‘한 민족 두 국가’ ‘합작과 연정’을 일관되게 제안하는 것은 ‘전쟁의 우려’와 ‘좌도우기의 희망’ 때문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대안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가치를 체득(體得)하고, 새로운 세상을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는 실무능력을 함께 갖춘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연대야말로 인류라고 하는 긴 동선의 앞 부분이 될 것이다.

이 앞 부분을 더 해방하라!
이 앞 부분을 더 나아가게 하라!
그리하여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과제들을 현대의 빛 속에서 해결하게 하라!
그리하여 동선이 긴 인류공동체 안에서 모든 개체들이 빛나게 자신을 실현하게 하라!

그동안 긴 글을 읽어주신 시대정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리고, 이런 글을 실어준 시대정신 편집부에 감사드린다. 격월간지 ‘시대정신’이 이 나라 더 나아가 지금의 인류가 실현해야할 ‘시대정신’을 발견하고 실현하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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