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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통신] 북한의 통치 논리와 여성의 위상


[박인호 | 데일리NK 북한연구실장]
1. 들어가며

최근 북한인권 개선 논의에서 눈에 띄는 흐름은 북한 여성의 인권 개선과 북한 체제변화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시장화 현상이 전 사회로 확산되면서 북한 여성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경제난에서 비롯된 여성의 사적 경제활동은 북한 시장화를 촉진했던 핵심 동력으로 평가된다. 특히 2005~2009년 사이 김정일의 집요한 반(反)시장 정책이 무력화되면서 불가능할 듯 보였던 아래로부터 체제전환에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북한 여성들이 체제전환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수도 있다”는 주장은 아직까지 가설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김정은 시대 북한의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검토 의의를 갖는다. 당분간 북한 내부에서 시민사회가 형성되기 쉽지 않은 조건을 고려하면 여기까지 시장화를 구축해 온 북한 여성들의 활약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소중하다.

이 글은 북한 정권 수립부터 현재까지 북한 여성의 위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성의 위상은 어떤 기준과 범주에서 평가하느냐에 따라 그 결론이 달라질 수 있는데, 우선 북한의 통치 논리가 여성들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배제되었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어느 사회나 여성의 위상을 규정하는 특정 이념이나 통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민주주의 이념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는 그에 따라 여성의 위상이 결정되며, 독재사회에서는 독재 논리에 따라 여성의 위상이 추락한다. 특히 통치 논리는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에서 그 실체가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전민(全民)의식화·조직화를 집요하게 추진해 온 북한이 그렇다. 여성의 위상은 가정과 사회라는 양대 영역에서 평가할 수 있는데, 북한의 경우에는 사회영역이 생산활동 영역인 ‘직장’과 정치활동 영역인 ‘조직’으로 구별된다.

이 글에서는 ‘만 30세 이상 만 60세 미만의 기혼여성’을 고찰 대상으로 상정한다. 일단 북한 정권이 앞세우는 여성상은 ‘아내+어머니’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또한 북한 여성의 생애주기에서는 20대 말~30대 초반 혼인율이 매우 높다는 점도 고려했다. 2008년 북한 인구센서스 결과를 놓고 보면 30대에 진입한 북한여성의 미혼율은 5% 미만으로 급격히 떨어진다. 30대에 진입한 여성은 거의 대부분 가정, 직장, 조직이 확정되며,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 조건이 삶의마지막까지 인생의 질과 성격을 규정하게 된다.

2. 김일성 시대 여성정책

북한 정권의 초기 여성정책은 사회주의 혁명 노선에 근거하였다. 여성 차별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든 필연적인 결과이며,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여성해방이 가능하다는 사회주의 이론에 의하면, 자본주의 체제는 남성의 사회적 노동에만 임금을 지불하고, 여성의 사적노동(가사노동)에 대해서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결국 남성의 사회적 노동은 일정한 평가를 받지만, 여성의 가사노동은 평가절하 되고, 여성은 남성보다 불평등한 대우를 받게 된다. 따라서 여성은 사회주의 혁명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사회주의 체제가 확립되어야 여성의 생물학적 기능(출산)과 사회적 의무(노동)가 결합될 수 있고, 이를 통해 여성은 진정한 인간으로서 위상을 갖는다. 여성을 사회주의 혁명에 참여시기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으로 의식화·조직화시킬 필요가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노동계급의 지도 정당은 반드시 하부에 여성조직을 두어야 한다. 북한 역시 이러한 일반론에 입각해 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을 당 외곽조직으로 결성했다.

사회주의 혁명 노선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시대의 낡은 봉건주의를 타파하는 것도 북한 여성정책의 주요 목표로 제시됐다. 바로 ‘반봉건주의 노선’이다. 이에따라 북한에서는 사회에 만연된 남존여비 사상을 타파하고 여성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권리 전반을 남성과 동등하게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입법이 추진되었다.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명의로 공포된 <조선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을 살펴보면 사회주의적 지향과 봉건주의 잔재에 대한 거부감이 강력하게 드러난다. 이 법령은 ▲여성의 선거권/피선거권 보장 ▲동일노동 동일임금 적용 ▲결혼 이혼의 자유 및 양육비 소송권 보장 ▲축첩 및 성매매 금지 ▲재산권 및 상속권 보장 등이 주요 내용으로 채워졌다.

북한의 전후 복구사업이 본격화 되면서 여성의 위상에 변화가 일어났다. 북한은 전략적으로 인민경제 각 분야에 여성을 적극적으로 인입시킬 것(1958년 내각 결정 제84호)과 당·정·사회단체에서 여성간부의 비중을 높일 것(1958년 김일성 교시) 등을 적극 강조했다. 이는 전후 복구사업과 생산력 증대 운동에서 여성의 노동력 동원이 절실했던 당시 상황과 연관이 깊다. Eberstadt와 Banister(1992)의 연구에 따르면 1946년에는 북한 남녀 인구가 거의 비슷했으나, 한국전쟁 이후 여성 인구 100명 당 남성 인구가 88.31 명까지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중 남성의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남성인구는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95명 수준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을 가정에서 사회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가사와 육아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것이 선결과제다. 북한은 한국전쟁 개시 직전까지 10여 개 수준이던 탁아소를 1964년 기준 6,700여 개까지 늘렸다. 유치원 역시 5,800여 개로 증가했다. 세탁소, 재봉소, 가족식당 등 여성 대상 편의봉사 시설도 이 무렵 마련됐다. 김일성이 생전에 꽤나 자랑했던 밥공장, 반찬공장도 1968년부터 세워졌다. 그 결과 1960년대부터 경공업 분야에서 여성 노동자 숫자는 절반을 넘어섰고, 상업 및 유통 부문에서는 90%를 넘어섰다. 1960년대 중반에는 전체 노동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절반에 육박하게 된다.

여성들에 대한 사회동원이 양적으로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였으나, 여성 인력의 질적 활용은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1960년대부터는 북한 사회 전반에서 고급인력 부족 문제가 드러나는데, 여성 노동력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은 남편과 가정의 울타리 내부에서 자신의 역할을 규정하려는 분위기가 만연했던 것 같다. 노동당 중하급 간부들의 대중 정치교양 능력은 아직 미숙했고, 북한의 사회주의 공교육 시스템은 걸음마 단계였다. 1958년부터 인민학교 4년과 중학교 3년으로 구성된 ‘7년제 중등 의무교육제’가 시작됐으니 공교육이 여성 인력 양성에 효과를 나타내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김일성은 여성들의 사회활동 참여가 갖는 장점에 대해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참여할 수 있고 ▲현실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건강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설명할 정도였다. 심지어 1971년 김일성의 발언에서는 “식충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여성들이 사회와 동떨어져 가족중심의 이기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면 나라와 사회를 좀 먹는 존재가 된다는 지적이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남편에 기대어 사는 여성들을 못마땅하게 평가했던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여성들을 가정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존재로 규정했던 것도 아니다.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북한 정치는 1당 독재에서 1인 독재로 변질되고 김정일 후계가 준비된다. 이때부터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이 부쩍 강조된다. 물론 “가정에서 여성들이 사회주의 교양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성이 사회노동을 통해 먼저 계급성을 높여야 한다”는 논리는 이미 1960년대부터 만들어졌다. 그런데 1970년대 북한의 정치 변화 과정에서 여성의 ‘노동계급화’는 ‘김 씨 부자에 대한 충실성’으로 점차 교체됐다. 북한 사회가 김일성을 가장으로 하는 대가족 집단으로 규정됨에 따라 각 가정에서 여성들이 김일성에 대한 충실성을 높이는 데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논리가 추가된 것이다. 탈북자들을 접해보면, 북한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은 것에 대해 놀라게 된다. 사회주의 남녀평등론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전근대적 가부장문화의 온존과 빈곤이 남녀불평등의 원인이라고 보여진다. 김정일 통치기에 성불평등은 더 악화되지만, 그 원형이 김일성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3. 김정일 시대 여성정책

1980년대 김정일 후계가 내외에 공고화되면서 북한의 여성정책은 1970년대 수준에서 머무는 모습을 보인다. 조금 긍정적으로 평가해준다면, 1980년대까지는 여성을 생산현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유인책과 여성들이 수행해야 할 의무가 공존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90년대 경제난이 시작되면서 여성에게 적용되는 논리는 또 한 번 변화를 겪는다. 경제난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사회 보호 정책이 유명무실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고강도 헌신성’을 요구한 것이다. 가족의 먹고사는 문제마저 여성의 책임으로 떠넘겨졌다.

김일성 시대에 요구됐던 여성의 역할은 대략 다음과 같다. 결혼 직전까지는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주의 혁명에 참여한다. 결혼을 하게 되면 사회주의 혁명과 체제 보위를 떠맡고 있는 남편을 내조하며,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혁명 후대를 낳고 키우고 교육하며, 틈틈이 국가사업과 관련한 후방 공급에 일조한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이러한 기조는 의미를 상실했다. 경제난은 여성의 가사노동을 더욱 고단하게 만들었다. 식수를 길어 나르고, 땔감을 구하며, 탁아소와 유치원에 의지하던 자녀 양육도 직접 해결해야 했다. 식량배급이나 임금은 여성 몫부터 중단됐다. 그러면서도 여성들은 남편을 대신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당을 대신하여 이웃을 돌보는 일에도 참여해야 하며, 각종 동원과 납부도 감수해야 한다. 심지어 ‘선군(先軍)정치’ 시대에 배곯는 군인들에 대한 후방 공급 사업에서도 여성들의 분발과 각성이 촉구됐다.

이 시기 여성의 인권은 극악한 수준으로 후퇴했다. 김정일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1980년대까지는 북한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는 사회적 규범체계가 일정하게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제난으로 사회 규범체계가 와해되면서 1990년대 후반부터는 무위도식하는 남편들의 음주 폭력이 늘어났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집 밖으로 나가면 더욱 심각한 폭력이 도사리고 있었다. 강도, 성폭행, 살해 등 여성들은 중범죄에 시달렸다. 탈북한 여성들에게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국가 폭력이 가해졌다.

‘꽃’과 관련한 북한 사회의 비유는 당시 여성의 인권이 얼마나 극적으로 추락하게 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북한에서 꽃과 여성의 관련성은 그 역사가 깊다. 1930년대 김일성이 창작하였다고 강조되는 북한 최고의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는 후계자 시절(1972년) 김정일의 주도로 등장됐다. 꽃 파는 처녀는 바로 ‘꽃분이’이다. 주인공 꽃분이는 가난한 머슴 가정에 태어나 지주와 일제의 만행에 시달리다가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한다. 꽃분이는 김일성 항일무장투쟁 신화를 입증하는 상징이다. 1991년 역시 김정일의 주도로 배포된 북한 대중가요 <여성은 꽃이라네>도 흥미롭다. 

이 노래는 1990년대에 한국의 NL운동권 내부에도 꽤 알려졌다. 당시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이 발간한 민중가요 노래집에도 수록될 정도로 대학생들에게 전파됐다. 김정일은 시인 김송남이 창작한 시를 보고 받고, 자신이 직할하는 ‘보천보전자악단’에게 곡을 붙이게 하여 주민들에게 보급했다. 사실 가사는 평범하다. 아내와 누나, 즉 여성이 없었다면 생활·행복·나라의 한 자리가 비었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결국 여성은 가정과 나라의 꽃이라는 의미이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1991년은 외형적으로 북한체제가 건재했던 시절이다. 외부로부터 사회주의 붕괴 바람이 전해지고 있었으나, 김일성-김정일 부자세습 성공으로 북한 내부는 평온해 보였다. 여성을 가정과 국가의 꽃이라고 내세우며 체제안정을 자찬할 ‘여유’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불과 3년 후 김일성의 사망과 전대미문의 경제난이 이어진다. 여성이 가족과 국가를 먹여 살리는 시대가 되었으니 “여성은 꽃이라네”라는 정의는 여전히 유효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에 북한 주민들 사이에 등장한 신조어는 그 의미가 매우 충격적이다. 탑-다운 방식으로 만들어졌던 ‘꽃’의 이미지가 민초들 사이에서는 정반대의 의미로 회자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꽃 파는 여성’이다. ‘꽃 파는 여성’은 성매매 여성을 의미한다. 남성에게 “꽃 사세요.”라며 접근한다고 하여 붙여진 은어이다. 비슷한 의미로‘꽃 파는 여자’, ‘꽃 장사’ 등이 파생됐다. 후계자 시절 김정일은 ‘꽃’을 이용해 여성을 혁명과 건설의 상징으로 포장했지만, 정작 자신의 집권 기간에는 ‘꽃 파는 여성’의 등장을 막지 못했다.

한편, 2000년대 북한의 종합시장 정책의 일면에는 여성 정책에 대한 새로운 발상이 담겨 있다. 유휴 노동력처럼 간주되던 전업주부들을 상업 및 편의봉사(서비스업) 분야로 적극 수용한 것이다. 2004년부터 북한 전역에 종합시장이 설치되는데, 종합시장 매대에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된 사람은 전업주부였다. 북한에서는 전업주부를 ‘가두여성(街頭女性)’이라 부르는데, 직장에 소속되지 않은 기혼 여성이다. 김정일은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의 연장선에서 각 생산 단위의 처분 권한을 일부 보장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국가 유통망을 효율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종합시장 건설을 승인하게 된다. 

이미 직장에 소속되어 있는 남성과 여성들을 종합시장 활동에 참여시킬 경우 국가계획경제 원칙과 충돌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유휴 인력인 전업주부에게 장사할 기회를 준 것이다. 계획 입안 단계에서는 그럴 듯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정작 종합시장은 마치 블랙홀처럼 북한사회 전반을 빨아들였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질과 양에 있어서 급격히 확대됐다. 장사하는 여성의 숫자가 늘어났을 뿐 아니라, 여성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남성들의 기대 수입과는 비교불가 수준으로 증가했다. 종합시장의 등장과 시장화 현상으로 인해 북한 여성의 위상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2009년 화폐개혁 등 김정일의 반 시장화 정책이 집요하게 추진되었으나, 대세를 뒤집지 못했다. 김정일은 생전에 적어도 두 가지 분명한 실패를 경험했다. 바로 ‘탈북’과 ‘장사’이다. 두 가지 모두 여성들이 주도했다.

4. 김정은 시대 여성정책

김정은 집권 초반기부터 부인 이설주가 북한 매체에 빈번하게 등장했는데 이에 따라 김정은이 김정일과 다른 여성관 혹은 여성정책을 선보이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설주를 매개로 ‘신(新)여성론’이 등장할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김정은의 여성정책이라고 부를 만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김정은의 전반적인 통치 기조가 ‘유훈관철’이라는 점에서 여성정책 역시 과거 답습 수준일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매체가 강조하는 여성상 역시 김일성 시대와 차이가 없다. 여성의 역할을 ‘화목한 가정’과 ‘사회주의 생활문화’로 규정한 것 정도이다. 

굳이 차이를 언급하자면, ‘아내+어머니’ 개념에서 ‘며느리’가 추가된 정도다. 이는 이설주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가능하다. 김정은이 집권 초반 여성복지 차원에서 취한 조치 중에는 북한 최대 산부인과병원으로 평가되는 ‘평양산원’에 유선종양연구소(유방암센터)를 설치한 것이 있다. 생모 고영희가 유방암으로 사망한 것과 연관을 짓는 분석이 많다. 김정은이 2012년 ‘어머니 날’(11.16) 제정을 지시하고, 제4차 어머니대회를 평양에서 개최한 것도 이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이 행사에서 김정은의 고조모 리보익, 증조모 강반석, 조모 김정숙 등이 “조선 어머니의 귀감”으로 선전됐다. 생모 고영희에 대한 공식적인 우상화는 여전히 자제되고 있다. 결국 김정은 시대에 제시되는 여성상은 ‘어머니’로 특정된다.

5. 조선민주여성동맹과 여성 동원

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은 1945년 11월 등장한 북조선민주여성동맹을 모태로 삼는 조선노동당 외곽단체이다. 북한 노동당은 전체 주민을 조직화하기 위해 아래에 연령, 계층, 직업별 외곽단체를 건설했는데, 여맹은 유일한 여성 대중조직이다. 여맹이라고 해서 모든 성인 여성이 가입하는 것은 아니다. 가입 순서로 보면 여맹은 가장 아랫자리로 밀린다. 노동당에 가입되지 않은 일반 여성 중에 직업조직과 연령조직에 가입되지 않은 여성들을 가입 대상으로 삼는다. 북한 성인 여성들은 만 30세 전까지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에 소속된다. 직업이 결정되면 직업총동맹, 농업근로자동맹,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등에 가입한다. 요약하면 만 60세 미만의 직업이 없는 전업주부와 만 55세 미만의 편의봉사 분야의 여성들이 여맹 가입 대상자다. 따라서 북한에서 여맹의 정치적 위상은 다른 당 외곽단체보다 낮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여맹을 김일성의 직접 지도 아래 창건된 대중 정치조직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맹은 철저히 노동당의 지도 아래 놓인다. 따라서 여성차별 철폐 등과 같은 이슈를 독자적으로 제기하는 등 여성조직으로서 특성을 발휘할 수가 없다. 양성평등의 전제인 여성의 자주권보다 수령과 당에 대한 충실성이 우선시 된다. 오직 최고지도자와 당을 위한 과제만 중요하게 부각된다. 따라서 여맹 조직의 변천과정은 북한의 정치변화에 철저히 종속되어 왔다. 1951년 1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결정에 따라 북조선민주여성동맹과 남조선민주여성동맹이 통합하여 여맹이 출범했다. 초대 중앙위원장은 박정애이다. 남편인 김용범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초대 총비서로 선출되자마자 암으로 사망했다. 이후 김일성을 지지한 덕에 국내파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여맹위원장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전쟁 중 여맹은 전선지원 돌격대 운동에 나서는 등 국가 동원사업을 벌이거나 현물 징수, 원호사업, 생산혁신 운동 등에 나섰다. 1960년까지 여맹 조직원수를 200만 명 넘게 확대했으며, 대외 교류활동의 범위도 넓혀갔다.

1965년 김옥순이 2대 여맹 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그녀의 남편 최광은 항일 빨치산 1세대로서 당시 북한군 총참모장이었다. 당시 김일성은 당 외곽단체들이 당 정책 관철에 소극적이고, 조직원들의 조직생활이 허술하다는 비판을 앞세웠다. 이에 따라 김옥순 시대 여맹은 정치조직화에 주력했다. 각급 회의와 생활총화 등에 규율을 세우고, 편의봉사 분야의 여맹원뿐 아니라 가내작업반에 소속된 전업주부에 대한 교양사업도 강화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맹은 1960년대 말까지 ▲여성에 대한 사회주의 사상교양 강화 ▲아이들에 대한 가정교양 강화 ▲여성들에 대한 국가건설사업 동원 등 김일성의 지시에 철저히 부합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1961년 <전국어머니대회>를 처음 개최하며 ‘공산주의 어머니’ 역할을 다그치기도 했다.

3대 여맹 위원장은 김일성의 두 번째 처 김성애이다. 1971년부터 여맹을 맡은 김성애는 당시 김일성과 노동당이 추진하던 사상·기술·문화 3대 혁명 노선에 따르는 사업을 벌였다. 여맹원들에게 주체사상 교양을 강화하고(사상혁명), 고등중학교 수준의 기술과 현대적 기술 소유를 촉구하였으며(기술혁명), ‘어머니학교’ 등을 개최해 아이들 교양사업(문화혁명) 등을 추진했다. 당시 여성의 노력동원이 눈에 띄게 늘자 김일성은 여성들이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를 떠밀고 있다면서 여맹 활동을 칭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 제6차 당 대회에서 김정일이 후계자로 내외에 공식화 되면서 김성애의 권력은 점점 추락하게 되었고 여맹의 위상 역시 급격히 축소됐다. 

실례로, 1983년 제5차 여맹 대회에서 여맹원 가입 기준이 변경되었는데, 기존에 ‘만 18세 이상 조선 공민 여성’이었던 가입대상 기준을 ‘다른 근로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여성’으로 축소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1984년까지 250만여 명을 헤아리던 여맹원 숫자가 1980년대 말 120만여 명 규모로 감소했다는 추정이 있다. 김성애의 추락 배경에는 김성갑의 인민대학습당 부지 사저 신축 사건과 김정일의 ‘곁가지 숙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1973년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은 평소 김일성이 인민대학습당 부지로 점찍어 둔 부지에 자기 어머니가 거주할 사저를 짓다가 김일성의 노여움을 샀다. 이를 계기로 김성애와 김성애의 두 아들(평일, 영일)을 견제해왔던 김정일이 김성애 일가의 비리를 김일성에게 낱낱이 보고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김정일은 1974년 평양시 당 전원회의에서 김성애와 자녀들을 ‘곁가지’로 규정하며 집요하게 견제했는데, 외교관으로 해외를 떠돌던 평일, 영일은 김일성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못했다. 1980년대부터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과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에 대한 우상화가 추진됐던 과정도 김성애의 추락과 관계가 깊다. 1998년 여맹 위원장은 천연옥으로 교체됐다. 김정일 시대에 여맹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으로 평가되는데,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 시대에는 단 한 번도 여맹 대회가 소집되지 않았을 정도이다. 다만 북한은 지난 5월 열렸던 제7차 당 대회의 후속사업 차원에서 오는 11월에 제6차 여맹 대회 소집을 예고했다. 무려 33년 만이다.천연옥 위원장 이후 박순희(2000년), 로성실(2008년), 김정순(2014) 등이 자리를 이었다. 

2000년대를 거치면서 여맹은 여성들을 생산 활동에 적접 참여시키기 보다는 노력 및 물자 지원을 통해 국가생산 분야를 지원하는 데 주력했다. 이는 시장화와 연관성이 깊다. 여맹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전업주부들과 편의봉사 분야 여성들은 2004년 종합시장 등장으로 인해 장사와 서비스 분야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보여줬다. 이들은 여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강제되는 각종 현물 납부 및 노력 동원을 회피하는 대가로 현금을 납부하기 시작했다. 이는 청년동맹이나 직맹 등 다른 당 외곽단체에서는 발생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여맹은 김정은 후계구도의 정당성을 내외에 시위하는 역할 외에는 뚜렷한 역할이 드러나지 않는다. 나이와 경험이 부족한 김정은을 국가의 가장(家長)으로 옹호하는 데 동원되는 수준이다.

6. 북한 여성의 위상

북한 정권은 유교적 봉건주의와 식민지 잔재 청산을 다짐하며 사회주의 이념을 적극 내세우는 등 최소한 여성문제에 있어서는 나름대로의 근대화를 추진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김일성 수령 독재 체제가 확립되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은 유명무실해졌다. 1990년대 경제난은 북한 여성들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며, 대량탈북과 시장화 과정에서 전대미문의 국가폭력이 일상화됐다. 김일성 시대에는 가정·직장·조직에서 상대적으로 일관된 통치 이데올로기가 작동했다고 볼 수 있으나, 김정일 시대에는 가정·직장·조직에서 서로 다른 논리가 충돌과 경합을 반복했다. 가정에서는 부양자로서 여성의 책임이 늘어났으나, 생산력이 축소된 직장에서는 여성을 밀어냈고, 각 조직들은 여성을 강탈과 동원의 대상으로 삼았다.

김정은 시대 북한 여성들은 종합시장이라는 공간을 이용해 새로운 위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새로워진 위상에 따라 향후 북한체제 변화에서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해질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다만 북한 여성의 새로운 위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북한 여성들은 가정뿐 아니라 각급 생산단위와 당 외곽조직, 넓게 보면 북한 체제유지와 관련하여 중요 행위자로 부상했다.

둘째, 북한 여성들은 ‘등가교환’을 매개로 개인과 개인의 수평적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각종 정보 유통의 매개자로 부상했다.

셋째, 북한 여성들은 최소한 북한 정권의 시장정책과 관련하여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는 동일집단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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