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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24시] '비선실세'는 어디나 있다


[김태진 | 전 공보처 전문위원 ]

2012년 12월 19일 오후 9시 8분,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당선 확실 속보가 뜨던 그 시간 보수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선거운동 막바지, 문재인 후보 지지층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자칫 대한민국의 가치가 훼손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팽배했었는데, 막상 투표함을 개봉하자 불과 2시간 만에 당선 유력 보도가 나온 것이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변함없는 애국심과 검증된 리더십, 그리고 인간적 신뢰가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도 “휴전선은요?”라며 안보를 걱정했다는 일화, ‘차떼기당’이라는 오명과 탄핵 역풍에 휘말렸던 한나라당을 이끌고 2004년 4.13 총선을 이끌었던 리더십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평소 엄격한 자기관리로 유명했던 만큼 역대 정권마다 되풀이되었던 측근 비리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국민적 기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4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16년 12월 9일 오후 4시 14분, 20대 국회는 재적의원 300명 중 299명이 참석한 가운데, 찬성 234, 반대 56, 무효 7, 기권 2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형식상으로는 국회가 탄핵이라는 법적 절차를 진행한 것이지만, 전국을 뒤덮은 촛불집회가 정치권을 움직인 만큼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직을박탈한 것과 다름없다. 4년 전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환호했던 지지자들의 상당수가 ‘탄핵 촛불’을 들었고 당시 선거캠프에서 일했던 동료들은 ‘최순실 선거운동을 해준 셈’이라며 쓴맛을 다셨다.


국회에서 통과된 탄핵소추안에는 국민주권주의 등 13가지 헌법 위반 사례와 직권남용 및 뇌물죄 등 4가지 범죄행위가 적시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헌법과 국민이 부여한 통치권을 일개 사인(私人)과 공유했다는 데 있다. 정치와는 무관한 최순실이라는 인물이 인사권 전횡과 입시비리, 재벌 경영까지 간여하면서 대한민국의 공적 시스템을 철저하게 무력화시켰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전체가 좌절감에 빠져버린 것이다. 더구나 최소한 애국심과 리더십 만큼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 낫다고 믿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이토록 무능하고 비상식적인 국정운영을 일삼았다는 데 대한 실망은 5%의 지지율로도 표현될 수 없을 정도다.


국회 내 ‘비선 실세’


하지만 이번 사태로 인한 상실감은 비단 최순실과 대통령의 사례에 그치지 않는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렸던 ‘비선 실세’가 우리 사회 곳곳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국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당초 최순실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던 사건 중 하나는 대통령 연설문이다. ‘강남 아줌마’에 불과한 최순실 씨가 대통령의 연설문을 사전에 읽어보고 수정까지 했다는 사실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지만, 적어도 여의도 일대에서 이런 일은 흔하디흔한 일이다. 처음 관련 내용이 보도되었을 때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나도 연설문을 쓸 때 친구의 도움을 받는다”고 한 것도 이러한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며,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비선’의 존재를 시인한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 국회 보좌진이 작성한 기자회견문과 보도자료 등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수정되어 오는 일은 국회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는 일이다. 심지어 국회의원으로서는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당내 선거 출마선언문이 기자회견 당일 아침 전혀 엉뚱한 내용으로 바뀌어 오기도 한다. 의원의 경력과 당내 위치, 선거의 컨셉 등을 고려해 보좌진들이 회의를 거쳐 최종 완성한 내용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수정되어 발표될 때 느끼는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근본적 의문에 ‘비선 실세’의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좌절감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비선’이 결정하는 일은 단지 연설문에 그치지 않는다. 일상적으로는 지역구 주민들에게 보내는 문자내용부터 국회의원의 사진, 선거용 홍보물에 이르기까지 국회의원 스스로 결정을 미룬 채 ‘비선’에 의존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어떤 의원은 홍보물에 쓸 사진을 결정하지 못해 집으로 들고 갔다가 다음날 ‘사모님’의 뜻에 따라 결정하기도 하고, 보도자료에 다른 사진을 썼다가 ‘비선’으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는 경우도 있다. 국회의원의 블로그 등 SNS를 비선이 직접 관리하는 바람에 오류가 발생하거나 답글이 필요할 때 일일이 비선에게 연락해 수정을 요구하는 비상식적인 상황도 있다. 그나마 ‘비선’의 능력이 탁월하다면 ‘협력 체제’도 가능할 텐데 문맥이 안 맞거나 오탈자가 심해 일일이 재수정을 해야 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이거나, 의원에게 편향된 인식과 의견만을 전달할 경우 보좌진의 업무는 두 배 세 배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비선’의 존재는 다양하다. 국회의원 부인일 수도 있고, 아들이나 동생, 지인일 수도 있다. 각 국회의원이 처한 환경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비선’은 어디나 존재한다. 당사자인 국회의원은 보다 많은 의견을 듣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반문하지만, 문제는 적정선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견해나 아이디어를 수용하는 차원이면 모르지만, ‘비선’에 결정권을 부여하는 것은 자신의 권한을 일정 부분 양도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 경우 보좌진은 ‘비선’과 구체적 내용에 관해 상의해야 하며 ‘비선’에게 의도와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까지 해야 한다. ‘비선’ 자체가 국회의원의 대리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국회뿐만이 아니다. 검찰은 권력 눈치보기에 급급하고 전관예우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5공시절 탈주범 지강헌이 외쳤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기업에서는 누구 라인이냐에 따라 출세와 좌천이 반복되는가 하면, 각 팀과 조직마다 상급자의 비위를 맞추며 실세 노릇을 하는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교수의 몸종노릇을 하지 않으면 강사 자리는커녕 박사논문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홍보물 인쇄와 꽃배달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인맥이 동원된다. 우리는 과연 ‘비선 실세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권위주의 청산의 기회로 삼아야


전국을 뒤덮은 ‘촛불 민심’에 나타난 국민적 요구는 비단 ‘대통령의 탄핵’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 곳곳을 뒤덮은 비정상적 시스템, 여의도 정치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비선의 그림자를 국민들이 모를 리 없다. ‘촛불’에 담긴 민의는 수많은 정치인들이 ‘공정한 사회’를 외쳤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돈과 권력의 매커니즘, 권위주의적 잔재를 이제 그만 걷어내야 한다는 절규에 가깝다. 하지만 현재 국회의원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이번 사태에 견주어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어느 누구도 ‘비선’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대통령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례는 다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으며 그 자체로 국민을 기만한 행위지만, 대통령을 비난하는 여야 정치인들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는 것도 사실이다. ‘국가대청소’를 외치는 유력 대선주자 역시 과거 비선 논란에 휩싸였던 당사자이며, 그가 주장하는 대청소는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하다.


단 하나 의지할 곳은 국민이다. 지금은 국가시스템이 뿌리째 뒤흔들릴 정도의 대혼란의 한복판에 서 있지만, 이는 대한민국이 과거 권위주의의 잔재를 털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성장통이기도 하다. 혁명이 아니고는 절대 불가능한 사회대변혁의 에너지가 ‘촛불’로 승화, 결집되었고, 정치를 포기한 정치인들을 국민들이 리드하며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유일한 희망이다. 과거 거대한 외부 침략이 있을 때마다 한반도를 지켜낸 장본인은 군왕이 아니라 국민이었던 것처럼, 지금의 이 위기 역시 국민의 힘으로 극복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권은 엄청난 시험에 직면해 있다. 비록 지금은 대통령 문제에 가려 있지만 다음 탄핵의 대상은 국회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권 스스로 개혁의 대상임을 인정하고 기득권을 내려놓을 때 우리나라는 비로소 권위주의의 잔재를 벗을 수 있다. 최순실 사태는 분명 대한민국 현대사에 가장 부끄러운 기록 중 하나이지만, 새로운 변화의 동력으로 남길지 여부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국민이 만들어갈 또 다른 기적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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