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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현대사 ⑨] 물개와 인어의 전성시대 그리고 들국화
세계와 음악과 존재와 소설에 대한 어떤 인간의 우연한 연대기

[남정욱 |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1.


1997년 4월 북한을 탈출, 서울에 들어온 황장엽 비서가 이런 감사의 말을 했다. “중국과 비율빈 정부에 감사드린다.”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율빈이 대체 뭐야?” 나이 든 분들은 덩달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율빈도 모르는 쟤네들은 대체 뭐야?” 비율빈比律賓은 필리핀의 한자 가차假借어다. 한때 우리는 외국 명칭을 다 그렇게 썼고 지금도 몇 나라는 여전히 그렇게 부른다. 미국, 영국, 불란서, 희랍, 태국, 월남, 이태리, 서반아西班牙, 서장西藏. 대부분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지만 듣기만 해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나라들도 있는데 가령 월사명니아越斯名尼亞(에스토니아), 득거마불得去馬弗(엘살바도르), 오려다吳呂茶(크로아티아) 등이 그렇다. 1978년에는 권성희, 전항, 홍신복으로 구성된 세샘트리오가 ‘나성에 가면’이라는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나성羅城은 L.A를 말한다.


비율빈은 우리에게 친숙한 나라다. 6~70년대 우리와 가장 많은 권투 시합을 했고(이른바 한비전韓比戰) 우리보다 무려 세 배나 잘 살아 한때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다보니 서울 중구에 있는 장충체육관도 비율빈에서 지어준 것으로 소문이 났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장충체육관은 서울시 예산 5억6000여 만환(5600만원)을 들여 60년 기공, 63년 준공한 것으로 당시 국내 최고의 건축가 김정수씨가 설계를 맡았다. 시공 역시 우리 건설사인 삼부토건이 담당했다. 소문이 사실처럼 퍼진 것은 2011년 이명박 대통령이 비율빈을 방문 했을 때 교민들 앞에서 한 발언 때문이다. 한국과 비율빈의 경제 역전을 극적으로 설명하려다 필리핀 회사가 미국대사관, 문화관광부, 장충체육관을 설계하고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명색이 건설회사 출신이라는 분이 설마 몰랐을 리는 없고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다.


미국 대사관과 문화관광부 건물은 미국 기업이 설계하고 시공했다. 비율빈에서 지었다고 소문이 난 것은 의사소통 때문에 비율빈 노동자를 고용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율빈이 우리에게 심정적으로 친근했던 건 아마 권위주의 정권이 오랫동안 권력을 장악한 사연 때문일 것이다. 비율빈은 1965년부터 무려 21년간이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대통령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그 체제가 무너진 게 1986년이다. 1983년 아키노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1986년 대선에서 아키노의 부인인 코라손 아키노를 낙선시키고 재선에 성공했으나 반정부 시위를 견디지 못하고 그 해 2월 하와이로 망명했다. 뉴스를 보던 사람들은 마치 우리 일인 양 기뻐했는데 86년이면 집권 6년 차였던 전두환 정권과 국민들의 불화가 극에 달하기 직전이다. 비율빈도 무너졌는데 우리도 하는 생각들이 있었을 것이고 이는 87년 6월 대규모 시위로 현실화된다. 한국과 비율빈의 경제 역전은 농지개혁 때문이다. 토지 귀족들이 전 국토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비율빈에서는 제대로 된 농지개혁을 하지 못했고 이는 산업화로 가는 길을 가로 막았다. 심지어 민주화의 상징이라는 아키노 집안마저 엄청난 토지를 보유한 토지 귀족 가문이라니 그 나라의 앞날이 참 걱정이다. 

 

그해 6월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터졌고 정권의 도덕성은 타격을 입었으며 사법부와 언론까지 권력의 시녀 소리를 들었다. 성고문 사건의 발단은 5.3 인천 사태였다. 신한민주당은 1986년 2월부터 직선제 개헌을 위한 1000만 명 서명 운동을 시작한다. 여기에 김대중, 김영삼이 주도하는 민주화추진협의회가 가세하여 세를 불려나가지만 민중 운동 세력과 충돌이 난다. 30만 명이 모인 광주 대회에서는 ‘광주학살 책임자처벌’ 구호가 터져 나왔고 10만 명이 모인 대구 대회에서는 민통련이 주도하는 별도의 군중대회가 진행되기까지 했다. 주도권 장악에서 위기감을 느낀 김대중은 소수 학생의 과격한 주장을 지지할 수 없다며 선을 그었고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이민우 신한민주당 총재가 좌익 학생들을 단호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발언으로 정치권과 운동 세력 간에 결정적으로 금이 간다.


이러다 터진 것이  5.3 인천사태다. 5월 3일 재야와 학생 운동권은 신한민주당 개헌추진위원회 인천 및 경기지부 결성대회가 열릴 예정이던 인천시민회관에서 시위를 벌였고 경찰 투입으로 대회는 무산된다. 1만여 명의 시위대는 도로를 장악했고 오후가 되면서 화염병이 등장했다. 이렇게 어긋났던 제도권 야당과 재야 운동권 세력의 협력 관계는 1년 뒤인 1987년 4월에 가서야 회복된다. 5월 3일의 시위가 절정에 달하던 오후 5시 30분 무렵 한강성심병원에서 학생 하나가 숨을 거둔다. 엿새 전인 4월 28일 분신을 기도한 서울대 생물학과 김세진이다. ‘전방 입소 전면 거부 및 한반도 미제 핵기지화 결사 저지’를 외치며 분신한 그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안타깝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죽음만큼은 동의하기 어렵다. 자기가 있고나서 세상도 있는 거다. 총체적으로 ‘뻘짓’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볼 때마다 이런 나라 차라리 망해버려라 하려다가도 말을 삼키는 것은 이런 죽음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분신을 했던 이재호는 김세진보다 23일을 더 살았다.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청년 김세진ㆍ이재호’라는 추모 문집으로 남아있다. 1990년 북한은 김세진에게 조국통일상을 추서했고 이후 평양의과대학 4학년에 편입시켰으며 2006년에는 다시 민족민주애국렬사로 추서했다. 짜증난다.


2.


86년 3월에는 78년 납치되었던 신상옥ㆍ최은희 커플이 8년 만에 북한을 탈출했다. 두 사람은 같이 납북된 게 아니라 최은희에 이어 신상옥이 6개월의 시간 차를 두고 북한으로 끌려갔다. 최은희 여사는 나중에 납북기에서 김정일과 처음 만났던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도 했다. “최 선생 보기에 내가 어떻게 생겼습네까? 난쟁이 똥자루 같지 않습네까?” 하며 농담을 건네던 당시 30대의 김정일 위원장은 모니터 6개를 직접 조작해 한국 TV 방송을 하나씩 틀어주기도 했고 남한 영화를 보다가 북한 군인을 연기한 배우를 가리키며 “통일 되면 저 새끼부터 혼내줘야겠어” 라며 웃기도 했다고 한다. 납북된 최은희가 절망감으로 북한 당국이 요구한 영화 작업을 거부하자 김정일은 “신 감독을 데려다 줄까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83년 자신의 생일 파티를 하는 자리에서 두 사람을 만나게 했다. “최 선생, 나 오늘 생일입니다. 오늘은 가족적인 모임이니까 누가 있나 보시지요.” 그래서 돌아보니 신상옥 감독이 빙그레 웃으며 한 쪽에 서 있더라는 이야기다.


깜짝쇼 끝에 김정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아버지에게 최은희 선생을 바쳤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렇게 최선생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신 감독에게 돌려 드립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이렇게 깨끗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두 사람은 김정일의 신임을 얻기 위해 2년 3개월 간 17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김정일과 만나는 자리에서 핸드백에 숨겨간 녹음기로 대화를 몰래 녹음했다. 이렇게 김정일의 육성이 담긴 다큐멘터리는 ‘연인과 독재자’라는 제목으로 2016년 9월 개봉, 화제를 모았다. 최은희 여사의 회고록에는 6.25때 피난을 가지 못하고 있다가 남한 군인에게 강간당한 이야기가 들어 있어 충격을 주기도 했다. 18세 때 촬영 기사와 결혼했지만 가정 폭력으로 이혼했던 최은희 여사는 신 감독이 사랑한다, 좋아한다 한다는 말 대신에 “평생 같이 영화 찍지 않을래?”라고 프로포즈해 넘어갔다고 한다. 신상옥 감독은 정말 최은희 여사와 영화만 열심히 찍었다. 예술인으로서는 100점, 가장으로는 0점. 신상옥 감독에 대한 최은희 여사의 평점이다.  
 

9월 20일부터 보름 동안 아시안 게임이 열렸다. 27개국 4,839명(임원 포함)이 참가했는데 그때까지의 아시안게임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북한을 필두로 라오스, 몽골, 베트남, 남예멘, 시리아, 캄보디아가 자발적 불참, 미얀마, 브루나이, 아프가니스탄은 사정상 불참이었다. 중국은 차기 대회 개최국이어서 어쩔 수 없이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금메달 93개 등 총 224개의 메달로 대회 2위를 기록했다. 1등은 중국, 3등은 일본이었다. 한국 스포츠 스타 중에는 아시안 게임 출신들이 많다(당연한 건가?).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인 김기수도 1958년 도쿄 대회에서 웰터급 금메달을 목에 걸며 얼굴을 알렸다. 당시 고교생 신분이었다. ‘아시아의 헤라클레스’ 원신희는 1974년 테헤란 대회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원신희의 다관왕 기록은 1986년 서울 대회 때 남자양궁 양창훈에 의해 깨진다. 여자 양궁 김진호는 1978년 방콕 대회부터 1986년까지 3연패를 달성했다.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 데뷔한 것도 1974년 테헤란 대회 때다. 1978년 방콕 대회에서는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2연패를 기록했다. 1982년 뉴델리 대회는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의 독무대였다. 최윤희는 배영 100m와 200m, 그리고 개인혼영 2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윤희의 성적은 1986년 서울 대회로 이어져 배영 100m와 200m에서 금메달을 가져간다. 86년 아시안 게임의 (한국에서의) 최고 스타는 임춘애였다. 저런 체구로 어떻게 달리나 싶게 가냘픈 몸매로 트랙에 나선 임춘애는 800미터에서 인도의 쿠리신칼이 실격하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녀는 “밥보다 라면으로 17년을 살았다”는 말로 국민들을 울렸고 “우유 마시는 친구가 부러웠다”는 말로 가슴을 저리게 했다. 그녀의 어록은 70년대 보릿고개의 마지막 증언이었다.


3.


남들이 뭘 했는지는 더듬더듬 떠오르는데 이상하게도 내 기억은 희미하다. 술을 많이 마셨던 것 같고 학교에 가는 날 보다 다른 데로 새는 날이 많았던 것 같다. 학교를 빠진  날은 주로 건대와 이대, 성대 쪽에서 놀았다. 노동운동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가명이 전태월이었다. 전태일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이름도 그렇게 지었던 것 같은데 얼굴이 하얗고  반반해서 아무리 봐도 ‘공순이’와는 맞지 않았다. 전태월이라는 이름이 노동운동가보다는 기생에게 어울린다는 말에 대판 싸우고 헤어졌다. 낮술을 많이 마셨다. 지금도 막 문을 연 학사주점의 시큼한 냄새가 기억난다. 이대 쪽에서는 목마름이란 술집을 자주 다녔다. 여자 친구 단골이었던 곳인데 이대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틀어 시장 골목을 따라 내려오면 모퉁이에 있었다. 안주로는 주로 꼬막을 시켜 먹었던 것 같다.


술이 오르면 각 테이블(아니지 상이라고 해야 하나)마다 제각기 다른 노래들을 불렀는데 누가 째려보건 말건 나는 팝송도 자주 불렀다. 불렀던 노래 중에는 뮤지컬 헤어의 ‘렛 더 선샤인 인(Let The Sunshine In)’이 기억난다. 지하 주점에서 나는 몹시도 선샤인을 그리워했던 것 같다. 성대는 이모집이었다. 대학로에서 성대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었는데 어지간히 자주 갔었나 보다. 나중에 졸업하고 다시 들를 기회가 있었는데 주인 아주머니는 아예 내가 성대생인 줄 알고 있었다. 어디 취직은 했냐고 반갑게 물어보는데 답을 바로 못했더니 두부 한 모를 서비스로 얹어주었다. 건대는 근처 주점은 물론이고 학교 안까지 들락거리며 놀았다. 이 정도 규모의 대학이 평지에 자리 잡은 경우는 별로 없다. 방학 때면 영어 강좌도 들었는데 1학년 때에는 토플을 들었고 2학년 때에는 버캐뷸러리 22,000을 그리고 3학년 때에는 성문종합영어를 들었다. 순서가 거꾸로 인 것 같지만 실은 이게 제대로 가는 인생이다. 천재가 범재되고 범재가 둔재 되는 게 사람의 이치다(물론 천재라는 건 아니다).


4.


 아시안 게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0월 28일 이른바 건국대 사태가 터진다. 전국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결성식이어서 애학투라고 줄여 말하기도 하는 이 사태는 전국 26개 대학 2,000여 명이 반외세 자주화, 반독재 민주화, 조국 통일의 구호를 내걸고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총 66시간 50분 동안 건국대학교 각 건물에서 경찰과 대치한 사건이다. 1,525명이 연행되고 1,290명이 구속됐으며 연행된 학생들에게는 용공좌경 분자라는 죄목이 적용됐다. 진압 작전명은 황소30이었다. 사태 직후 유언비어가 쏟아져 나왔다. 백골단(무술 경관)이 옥상에서 학생을 집어던졌다느니 불에 타 죽은 사람을 직접 봤다느니 워낙 증언들이 생생해서 많이들 솔깃했다. 나중에 남한 좌익 운동사를 보면서 이게 일명 시체팔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시체팔이의 시작은 대구 폭동 때다. 공산당은 경찰에 맞아죽은 시체가 필요했고 의대에 있던 심파(동조자)들이 해부실에서 시체를 조달했다. 시체는 폭동에 기름을 부었고 그 전통은 지금도 유구하게 이어지고 있다. 사실史實에서 사실事實이 드러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건국대 사태도 그 중 하나다. 사실事實 직전에 추론들이 먼저 등장하는데 내가 짐작하는 것은 이렇다. 다시 써 봐야 더 나아질 것도 없고 해서 이 부분은 졸저 ‘꾿빠이 386’에서 일부 발췌했다.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에 ‘수상한’ 학생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내부에 익숙치 않은 듯 메모를 꺼내 위치를 확인하던 이들은 전국에서 모인 29개 대학의 학생들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을 발족시킬 계획이었다. 민주광장에 2,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발족식이 시작됐고 잠시 후 경찰의 진압 작전이 개시되었다. 각 단과대로 쫓겨 들어간 학생들은 사흘 동안 경찰과 대치한 끝에 나흘째인 10월 31일 1,525명 전원이 연행되고 1,290명이 구속처리 된다. 이 사건으로 정권은 학생운동을 용공으로 몰아붙이는 재미를 보았고 운동권내에서도 좌익 맹동주의라는 비판이 나왔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몇 가지 있다. 북한 발 방송인 한민전의 구국의 소리 방송에서는 이 투쟁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이를 주사(주체사상) 보급 투쟁, 주사보급투쟁의 혁혁한 횃불이라고 높이 평가하며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대체 무슨 말일까.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애학투 사건은 애초부터 투쟁연합의 발족보다는 이를 통해 끊어졌던 각 대학과의 연계선을 회복하고 각 학교 운동 인자들을 포섭하여 NL 세력을 전국으로 확장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를 위해 특별히 선발된 50~100명 사이의 교육조가 투입되었고 이들은 감옥 안에서 주체사상 일부를 전파하며 이들과 심정적인 고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애학투 사건 관련 인사들이 인터넷 카페 등에 남긴 기록을 보면 ‘학생 운동 세력들을 일거에 탄압하고자 했던 의도였지만 권력의 의지는 반 밖에는 성공하지 못했다’며 ‘구속된 학생 운동권이 오히려 자유로운 토론의 장 속에서 자신들의 신념을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지 못한 공권력의 자충수’를 비웃고 있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두세 달에 이르는 시간 속에서 학생운동의 주도자들은 새로운 신념으로 자신을 무장한 채 출소 할 수 있었다’라는 문장에 이르면 새로운 신념이라는 것이 주사가 아니었을까 의심을 하게 된다. 실제로 이들은 학내 운동을 주도할 학년이 되면서 대부분의 총학생회를 장악했고 이는 전대협의 결성으로 이어진다. 사실이라면 참 대담한 기획력이다.

    - 남정욱, 꾿빠이 386 중에서 - 
  
물론 어디까지나 추론이다. 86년 PD 계열을 학생회에서 몰아낸 NL은 학생 운동의 주요 사업 부서인 조직국, 선전ㆍ선동국, 투쟁국을 연달아 접수하지만 연대 사업국에서 속도를 내지 못한다. 줄여서 연사국은 대학 간 연대 사업을 추진하던 곳으로 4국 중 가장 중요하며 비밀스럽고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NL이 주춤하는 사이 연대 사업국은 조직 자체를 통째로 성균관대와 합쳐 버린다(80년대 중반 이후 성균관대가 PD의 아성이 된 것은 이 때문). 문제는 서울대와 각 대학 운동권을 잇는 ‘선’이 다 끊어져 버린 것이다. 각 대학 운동권과 선을 잇기 위해서는 극단의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건국대 사태라는 추론이다. 아래의 블로그는 그 혐의에 충분한 내용인데 ‘새로운 신념’이라는 부분에서는 판독이 갈릴 수 있겠다. 마음을 다잡았다는 얘기인지 새로운 아이템으로 무장을 했다는 것인지. 내 판단은 후자다.   


5.


그래도 86년 겨울은 행복했다(85년의 악몽 같은 겨울에 비하면 정말 최고). 이유, 별거 아니다. 밴드 들국화의 2집이 나왔기 때문이다. 6인조로 개편한 첫 번째 앨범이기도 했는데  1집에 비해 강렬한 타이틀곡은 없는 대신 아기자기한 소품과 중독성 있는 노래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1집의 행진 같은 곡들은 사실 연달아 듣기에 다소 부담스럽다). 비틀즈의 ‘렛 잇 비’를 흉내 낸 들국화의 데뷔 앨범 재킷에는 4명의 멤버가 등장한다. 이 중 기타의 조덕환이 음악적 견해 차이로 팀을 탈퇴한다(음악계에서 이 표현은 ‘성격 차이로 이혼한다’와 비슷한 진짜 이유가 아니다. 그냥 다른 멤버들이 싫을 때, 혹은 돈 문제로 갈등이 생겼을 때 이 표현을 클리쉐처럼 쓴다). 3명이 남은 들국화에 공연 등에서 세션을 담당했던 주찬권, 손진태, 최구희가 가세해 배로 불어나 6명이 된 것이다. 기타가 하나인 것과 둘인 것은 음량의 차원이 아니라 음악의 질 자체가 달라지는 효과가 발생한다. 들국화 1기보다 연주력이 훨씬 뛰어난 밴드가 되었다는 얘기다. 연주뿐 아니라 코러스까지. 하여간 몹시 사운드가 풍족한 앨범이다.


그 해 겨울 이 앨범을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술 마시면서 듣고 술 깨면 듣고 소설 읽다가 집어던지고 듣고 뽀뽀하면서 들었다. 시절도 잘 맞아 겨울 분위기 나는 곡들이 제법 있었고 아닌 곡들도 듣다 보면 함박눈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좋아했던 노래는 ‘또 다시 크리스마스’였다. 드러머인 주찬권이 작사, 작곡을 했는데 멜로디가 예뻤다. 멜로디가 예쁘니 가사도 예쁘게 들렸다.


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설레는 마음과 함께/언제나 크리스마스 돌아오면 지난 추억을 생각해/크리스마스 또 돌아왔네 사랑의 느낌과 함께/누구나 크리스마스 돌아오면 따스한 사랑을 찾지/거리에는 캐롤송이 울리고 괜스레 바빠지는 발걸음/이름 모를 골목에선 슬픔도 많지만/어디에나 소리 없이 사랑은 내리네(후략)


 ‘이름 모를 골목에선 슬픔도 많지만’에서는 괜스레 눈물이 나왔다. 가난과 슬픔과 상처는 이렇게 살짝 지나가듯 다뤄야 더 아프고 서럽고 쓸쓸하다. 만약 무인도에 가져갈 한국 음반 한 장을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이 앨범을 들고 갈 것이다. 타령풍의 ‘너랑 나랑’이라는 노래는 둘이 같이 들으면 더 좋았다. 가사 중에 ‘만약에 내가 훌쩍 네 곁을 떠나면 너는 외로워 어이하리’라는 부분은 특히 전태월이 좋아했던 구절인데 따라 부르면서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내 얼굴을 빤히 보곤 했다. 나쁜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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