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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비평] 워터게이트가 말하는 언론의 본질


[우원재 | 칼럼니스트 ]

워싱턴 DC의 지역 신문에 불과했던 <워싱턴 포스트>를 전 세계의 저널리즘을 이끌어가는 언론으로 만든 사건이 있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 보도는 1972년부터 1974년 닉슨 사임까지, 총 2년에 걸쳐 벌어지는데, 그 긴 기간 동안 절대 권력의 방해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진실을 좇던 그 자세는 그야말로 탐사보도의 교과서이자 현대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저널리즘 이야기로 전해진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승리를 거두며 재선에 성공한 37대 미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사임에 이르게 만든 사건. 20대 후반의 두 젊은 기자가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나아가 미국 전체, 아니 세계가 칭송하도록 만든 사건.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알아보자.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때는 1972년 6월 17일. 늦은 밤이었다.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사용하던 워싱턴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모든 사건이 시작된다. 당시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근무하던 경비원이 건물 주차장의 문 위에 이상한 테이프가 묶여있는 것을 발견한다. 누군가가 건물에 침입한 흔적이라는 생각에 경비원은 곧바로 워싱턴 경찰에 신고를 한다. 경찰은 즉시 워터게이트 호텔로 출동했고, 민주당 전국위원회본부에 불법 침입한 괴한 5명을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경찰에 연행된 범인들은 자신들의 범행이 단순 절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체포 당시 정황과 경찰 수사에 따르면 이들은 결코 “단순 절도범”일 수 없었다. 체포될 당시 그들은 수술용 장갑을 끼고서 무전기, 경찰 라디오 전파를 도청하는 수신기, 사진기와 필름, 도청 녹음 장치, 최루탄 가스총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괴한 일당은 민주당 사무실 내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각종 서류를 카메라로 촬영하는 도중 체포되었었다. 단순 절도라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원조회 도중 붙잡힌 일당 중 한 명이 전직 CIA 출신이라는 사실도 드러난다.


바로 그 다음 날인 1972년 6월 18일, 워싱턴 포스트는 앞으로 있을 기나 긴 싸움의 첫 총성을 울린다. “다섯 명이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잡히다(5 Held in Plot to Bug Democrats’ Office Here)”. 워싱턴 포스트의 1면에 실린 기사 제목이었다. 이 기사는 워싱턴 포스트의 두 젊은 기자들의 흥미를 끈다. 워터게이트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밥 우드워드(Bob Woodward)와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이었다. 둘은 워터게이트 취재팀에 합류하며 나름의 조사를 시작한다. 우드워드는 한 경찰 관계자로부터 들은 “수술용 장갑을 끼고 수천 달러에 달하는 현금을 소지한 채 어딘가에 불법 침입한 것은 전형적인 ‘(기관의) 전문 작전’이다”라는 정보를 바탕으로 취재 방향을 잡았다.


그 다음 날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워터게이트 괴한 침입’ 사건과 관련한 경찰 수사에 주목하며 관련 기사를 내기 시작한다. 그 보도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붙잡힌 일당 중 한 명인 CIA 출신 제임스 맥코드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차기 대선을 준비하며 만든 닉슨 대통령 직속위원회(Committee to Re-elect the President, 이하 CRP)의 경비주임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게다가 체포 당시 소지하고 있던 수첩에서는 백악관 소속 보좌관인 애드워드 하워드 헌트의 백악관 연락처가 나오기도 했다. 하워드 헌트는 당시 CRP의 주요 실무자였다.


워터게이트에 침입한 일당은 이미 3주 전에도 민주당 사무실에 침입한 바 있으며, 현장에서 체포되었을 당시 이들은 작동하지 않는 도청기를 교체할 목적으로 재침입했던 것이었다.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에 CRP가 직접 개입했다는 정황, 그리고 나아가 백악관까지 연루되었을 가능성 등을 꼬집으며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이 기사를 내보내는 동안 ‘워터게이트 사건’은 경찰의 손에서 FBI 연방수사국의 소관으로 넘어간다. 이미 경찰이 처리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딥 스롯 (Deep Throat)


한편 백악관 대변인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질문에 “괴한들의 3급 절도였을 뿐, 백악관은 아는 바가 없다”로 일축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비서실장 H. R. 하이드만과 이 사건을 축소은폐할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CIA를 활용해 FBI로 하여금 관련 수사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고, 사건을 은폐하는 것이 주된 방향이었다. 이러한 축소·은폐 시도는 결국 이후에 닉슨 대통령을 사임에 이르게 한 죄가 되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최대한 조용하게 은폐하고 넘어가려던 백악관의 시도는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의 집요하고 날카로운 기사들에 의해 어려움을 겪었다. 둘은 관련 사건이 법정과 수사기관 등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상세 보도함과 더불어, 개인적인 수사와 취재에 착수해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기도 했다. 전직 CIA이자, CRP의 실무자인 하워드 헌트, 그리고 전직 FBI 요원 고든 리디가 워터게이트 괴한 침입 당시 맞은편 건물에서 무전기를 통해 괴한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는 혐의 사실을 보도했다.


또 마이애미로 날아간 번스타인은 닉슨 재선 선거자금 중 25,000달러가 워터게이트 침입 괴한의 은행으로 입금되었음을 확인했다. 이는 워터게이트 침입을 닉슨 캠프에서 지시했음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였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닉슨의 회계사 주디 밀러를 인터뷰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를 통해 알 수 없는 자금흐름과, 그 기록이 삭제된 흔적들을 찾아내 보도했다. 이렇듯 두 젊은 기자는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과 이를 덮기 위한 각종 계획에 FBI, CIA, 그리고 백악관이 개입하거나 방관하고있었다는 정황을 보여주는 각종 정보들을 제시해갔다. 거대 권력의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수사망은 점차 백악관을 향해 좁혀들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대통령의 지시로 각종 첩보기관과 수사기관이 사건을 은폐하고 수사를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20대 후반에 불과한 두 젊은 기자가 이토록 진실에 근접할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우드워드가 ‘딥 스롯(Deep Throat, 깊은 목구멍)’이라 칭한 내부고발자 덕분이었다. 세간의 관심과 수많은 질문에도 불구하고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그리고 워싱턴 포스트는 딥 스롯의 신원을 보호했는데, 33년이 지난 2005년에야 그 정체가 드러난다. 딥 스롯은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FBI의 부국장이었던 마크 펠트였다.


워터게이트 이전부터 우드워드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마크 펠트가 그에게 각종 정보를 제공해준 덕에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의 보도가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드워드와 펠트는 1972년 6월부터 1973년 1월 사이에 꾸준히 접촉하며 정보를 주고받았는데, 펠트가 FBI 내부에 있던 주요 정보를 흘려주면 우드워드가 사건의 퍼즐을 끼워 맞춰 전반적인 흐름을 잡아내고, 번스타인이 세세한 팩트체킹을 했다. 그 덕에 두 기자는 수사기관만이 알 수 있었던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의 각종 진실들을 기사로 옮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드워드와 펠트의 만남은 한 편의 첩보영화를 연상케 한다. 우드워드가 취재 방향이나 주요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펠트를 만나고자 할 때면 그는 자기 집 창문에 빨간 깃발을 꽂은 화분을 놓았다. 펠트가 우드워드에게 줄 정보가 있을 때에는 뉴욕타임즈 신문의 20번째 페이지에 시계를 그려놓았다. 둘은 그렇게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위치에서 은밀하게 접촉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딥 스롯의 암약은 공익적 측면에서 ‘내부고발자’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좋은 예다. 내부의 부패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를 폭로할 용기를 갖춘 내부고발자를 보호해야 할 이유기도 하다. 만일 워터게이트 취재 당시 외부 압박을 견디지 못해 워싱턴 포스트 측에서 딥 스롯의 신원보호를 포기해버렸다면, 마크 펠트는 FBI 부국장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을 테고, 미국 사회 전체는 양심을 가지고 내부 부패를 폭로해줄 사람을 잃게 됐을 것이다. 익명 정보원, 내부고발자 등에 대한 철저한 보호는 저널리즘의 기본으로, 무려 33년간이나 내부고발자를 보호한 워싱턴 포스트와 딥 스롯의 이야기는 지금도 교과서처럼 회자되고 있다.


백악관의 반격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워터게이트 사건은 대중들의 인식 속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1972년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 때문에 거의 모든 언론이 워터게이트에서 눈을 돌려 대선 상황을 조명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의 깊이있는 탐사 저널리즘(Investigative Journalism)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당시 언론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너무 심각했다. 베트남전 등과 관련해 행해진 언론의 프로파간다에 질려버린 사람들이 많았다. 매체에 대한 불신 수준(public distrust of the media)이 40%대를 기록하던 시절이었다.


재미있게도, 워터게이트의 피해자라 할 수 있는 민주당 쪽에서도 워터게이트 사건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다. 맥거번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나 민주당 지도부는 괴한들이 침입했었던 전국위원회 사무실에는 별 다른 기밀사항이 없었다며, 실질적인 피해를 입은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이 사건에 여론의 관심을 호소하지 않았다. 당시 민주당은 맥거번과 험프리의 경선이 너무 치열했던 나머지 당이 두 갈래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고, 베트남전 이후 민주당에 악화된 여론과 부통령 후보 중도 사퇴 등 갖가지 악재에 휩싸여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워터게이트 사건은 빠른 속도로 사람들로부터 잊혀지게 된다. 당시 여론은 철저하게 닉슨 편이었고, 닉슨의 지지층은 워터게이트를 철저히 무시했다. 워터게이트와 관련된 보도는 신문 지면 구석으로 밀려나거나 사라지게 되었으며, 끝까지 ‘메인 아젠다’로서 보도를 이어간 것은 워싱턴 포스트뿐이었다. 그리고 1972년 대선 결과, 닉슨이 선거인단 538명 중 520명을 가져가는 대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는 미국 대통령 선거 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이었다. 선거인단 방식이 아니라, 순수 유권자 득표수만 계산해도 전체표의 60%를 넘어가는 표를 가져갔으니 그야말로 닉슨은 여론을 등에 업고 있는 상황이었다.


재선에 성공한 닉슨은 노골적으로 워싱턴 포스트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다. 대통령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워싱턴 포스트를 압박했다. FBI, CIA는 물론, 연방커뮤니케이션위원회(FCC)까지 나섰다. 기습적인 세무조사를 포함해 워싱턴 포스트에 대한 각종 차별적인 일들이 벌어졌고,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은 정부의 “공개적 위협과 괴롭힘(unveiled threats and harassment)”에 대해 항의하기도 한다. 물론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을 포함해 편집국장 하워드 사이먼스, 편집주간 벤자민 브래들리 등 워싱턴 포스트의 중진들은 구속의 위협과 공개적인 모욕에 시달리고 있었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 워터게이트 사건을 바탕으로 몇 년 후 만들어진 영화다. 이 영화의 제목처럼 말 그대로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었다. 권력의 입김이 닿는 모든 조직은 물론, 심지어 여론까지 닉슨의 편이었다.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그리고 워싱턴 포스트는 코너에 몰렸다. 그러나 그들은 보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는 워싱턴 포스트의 간부들이 두 젊은 기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취재력을 믿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훗날 우드워드가 당시 워싱턴 포스트 중진들의 신뢰와 용기를 표현하기 위해 본인과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의 대화를 짧게 인용한 적 있다. 지칠대로 지친 우드워드가, “절대로 워터게이트의 진실 끝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아요”라고 하자 그레이엄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절대 못한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마.” 우드워드는 이 명언이 모든 보도의 좌우명이 될 만한 말이라고 평했다. 워싱턴 포스트가 각종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동안에,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사법절차는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국면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민주주의가 작동되도록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의 관련자들이 재판장에서 고위급이 개입한 사건 은폐(High level cover up)를 자백한 것이다. 재판을 맡았던 재판장 존 시리카(John Sirica)의 공이 컸다. 시리카는 평소에도 예측하기 어려운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재판을 진행하며 워터게이트 사건이 용의자들의 단독범행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그는, 편파적인 재판이었다는 비판이 나올 것을 감수하고서, 마치 검사처럼 용의자들을 쏘아붙이며 심문했다. 외부 개입 등에 초점을 맞춰 지시자가 누구였는지, 어떤 작전이 있었고, 어떤 은폐 시도가 있었는지 등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사법절차가 대통령의 권력에 의해 마비되지 않고 이렇듯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워싱턴 포스트의 끈질긴 보도 덕분이었다. 수사기관이 백악관 권력의 개입으로 인해 방해받고 있는 가운데, 독립적인 수사를 진행하고 사건과 관련된 증거나 정황들을 꾸준히 보도한 워싱턴 포스트가 없었다면 재판은 백악관이 유도했던대로 ‘3급 절도죄’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워터게이트 관련자들은 결국 모든 일이 백악관 핵심 인물들의 직접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폭로했다. 1973년 1월의 일이었다. 도청기를 설치한 범인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렇게 분위기가 급반전된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시작된 1972년 6월 17일부터 리처드 닉슨 대통령 사퇴인 1974년 8월 9일까지.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벌어진 사건이지만, 사실 워싱턴 포스트와 두 젊은 기자의 핵심 역할은 72년 6월부터 73년 1월까지였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드워드가 딥 스롯과 접촉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훗날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언론의 역할을 조명하며 한 기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워터게이트의 기자들은 대통령과 싸워서 그에게 승리한 게 아니었다.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걸 증명했던 것이다.”


말 그대로다. 워싱턴 포스트가 사활을 걸고 보도를 했기에 사법절차가 작동할 수 있었고, 결국 73년 1월에 결정적인 폭로가 나오게 되었다. “대통령의 사람들”에 의해 방해받던 시스템이 마침내 정상 가동되기 시작한다. 그 이후부터는 사건이 ‘민주주의의 시스템’에 의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시스템의 승리


상원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특별검사가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다. 닉슨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할 무렵에 상원에서 공개청문회가 열렸고, 이는 전국으로 TV 생중계되었다. 여기서 청문회에 나온 닉슨의 부보좌관이 대폭로를 한다.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는 모든 대화가 녹음되는 비밀 장치가 있다. 이 장치에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 은폐 공작에 직접 개입하는 내용이 녹음되어 있다.” 그 즉시 특검과 상원은 해당 테이프를 증거로 제출하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백악관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주요 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한다.


이제 닉슨은 사법당국과 싸우게 되었다. 닉슨은 당시 법무장관에게 연락해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를 해임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법무장관은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한다. 이후 닉슨은 법무장관의 권한대행이 된 법무차관에게 연락해 해임을 지시한다. 법무차관 역시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한다. 닉슨은 법무차관보였던 윌리엄 보크에게 연락을 해서 겨우 특별검사를 해임했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토요일 밤의 대학살(Saturday Night Massacre)’로 부르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대통령의 튼튼한 콘크리트 지지층 조차도 닉슨이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을 보며 등을 돌리게 된다.


악화된 여론을 붙잡기 위해 1973년 11월 17일, 닉슨은 400명의 기자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한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I am not a crook)”라는 닉슨의 유명한 말도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닉슨에 대한 각종 조사와 비판은 멈추지 않았다. 여론은 그에게 테이프 공개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결국 닉슨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주요 정보가 삭제된 편집 녹음본’을 공개하는 데에 합의한다. 그렇게 제출된 테이프에는 18분 30초 가량의 대화가 통째로 삭제되어 있었다. 의혹이 일어나자 백악관 측은 이것이 비서의 실수라며, 비서가 전화를 받는 도중 우연히 녹음기의 페달을 눌러 테이프가 삭제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여러 언론에서 “전화를 받으며 페달을 밟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반론을 제기했고, 이는 백악관의 의도적 증거물 훼손이라며 비판을 제기했다. 특별검사는 법원에 이의를 제기했고, 이 문제를 놓고 장기간 설전이 벌어진다. 결국 연방대법원은 1974년 7월 24일, 녹음 테이프에 대한 닉슨 대통령의 특권을 무효화하고, 특별검사에게 테이프를 넘겨줄 것을 명령하는 판결을 만장일치로 결정한다. 이 판결, ‘미국 정부 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United States vs. Richard Milhous Nixon,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은 대통령 특권의 한계선을 보여주는 주요 판례로 남게 된다.


일주일 후, 결국 원본 테이프가 공개되었다. 닉슨의 거짓말이 드러났다.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은폐 공작에 대한 모든 혐의와 관련성을 부인해왔지만, 테이프에는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 발생 후 며칠 뒤인 1972년 6월 23일에 닉슨이 CIA 국장에게 FBI의 수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녹음되어 있었다. 이 테이프는 스모킹 건(Smoking Gun, 혐의를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이라 불렸다. 탄핵이 준비되고 있는 가운데, 1974년 8월 8일 밤, 닉슨은 TV 연설을 통해 사임 의사를 밝힌다. 다음 날 8월 9일, 닉슨은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백악관에서 나온다.


워터게이트의 유산


2년에 걸친 워싱턴 포스트의 집요한 보도. 권력에 의해 마비된 사법기관을 대신해 그들이 용기있는 취재를 이어가지 않았다면,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은 그저 단순 절도 사건으로 마무리 됐을 것이다. 닉슨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율은 어렵지 않게 워터게이트 사건을 덮어버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닉슨 대통령 본인은 물론 비서실장, 보좌관 등 백악관 수뇌부 모두가 불법행위를 저질렀고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는 시도를 할 정도로 부패했었다는 사실도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 민주당 후보를 상대로 한 ‘랫퍼킹(Ratfucking. 불법선거운동)’의 존재도 그림자 속에 있었을 것이다. 민주당 후보자들의 사생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들의 가족을 미행하고, 후보자들의 편지 등을 위조 배포하고, 신문에 거짓정보나 루머를 누설하며, 유세일정을 교란하거나 방해하고, 선거운동 관련 기밀자료를 탈취하여 이용하는 등의 심각한 범죄가 관례처럼 이어져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언론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권력은 쉽게 부패한다. 그리고 그 부패한 권력은 종종 법과 제도를 마비시키고,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선다. 이러한 사실을 알려 시민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 그리고 그 시민들의 힘이 모여 민주주의가 다시 제 기능을 찾아가도록 돕는 것. 그것이 바로 언론의 역할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론을 부패한 권력을 감시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왓치독(Watchdog)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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